2000 년대 판타지 소설 고전 소개 (2) 하얀 로냐프 강

2000 년대 판타지 소설 소개 제 2탄

많은 웹소설과 판타지류의 웹툰들이 나오고 있지만 아직도 판타지 소설을 처음 접했을때의 그 감성과 놀라움은 잊지 못합니다. 이것은 아마 익숙해짐의 문제일 것입니다. 지금이야그런 컨텐츠들이 많고, 저 역시 이러저러 무뎌졌지만 제가 처음으로 판타지 소설을 읽었던시기에는 무협지들은 많았지만 그런 판타지 소설은 없었으니까요.

처음으로 소개한 것이 대한민국 최초의 판타지 소설인 바람의 마도사였고, 이번에는 그와는 조금은 결이다른 소설인 하얀 로냐프 강 을 소개하려 합니다. 요즘이야 특히 판타지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들이 막강한 힘을 가지고, 초인이나 영웅, 반인반신같은 존재로서 마구 때려부수는 먼치킨류의 설정이 꼭 필수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렇지만 2000 년대 판타지 소설에서는, 가즈나이트나 묵향 류가 나오기 전까지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바람의 마도사도 그랬고, 가장 위대한 소설 중 하나로 일컬어지는 이영도작가의 드래곤라자 류도 주인공이 그렇게 먼치킨은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대부분은 새드엔딩은 아니었는데, 이번에 소개할 작품인 하얀 로냐프 강은 새드엔딩입니다.

하얀 로냐프 강 (1999) 줄거리

이 작품 하얀 로냐프강을 소개하게 된 이유는, 첫번째로는 새드엔딩이라는 특징, 두번째로는 이리저리 때려부수는 주인공의 활약상이나 화려한 기술들, 마법들을 다룬 다른 판타지 소설과는 달리 특유의 서정적인 이야기(스토리)자체의 매력, 그리고 이 요소들이 저에게 주었던 강렬한 인상과 커다란 감동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 더, 이 작품이 제시했던 세계관의 요소들과 설정들이 독특하고 매력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포스팅을 쓰면서 검색을 해보니 대한민국 1세대 판타지 소설이고, 92년부터 PC통신에서 연재가 되었다가 1999년에 출간이 되었고, 책이 어지간히 많이 팔렸기때문에 2006년에 양장본으로 출간이 되었다고 합니다. 제가 몰랐던 사실은, 제가 읽었던 하얀 로냐프강은 1부이고, 그 뒤에 2부가 더 있다고 합니다. 1부만 해도 몇권이었는데 2부가 있을줄은 전혀 몰랐습니다. 1부 자체가 하나의 완결된 스토리기때문에 (엔딩을 보면 완결이 안될수가 없습니다) 2부는 같은 세계 안에서 일어나는 전혀 다른 인물들의 스토리라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줄거리와 설정

이 소설의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는 독특한 세계관이자 설정입니다. 큰 줄기로는 우리가 알고있는 중세 기사도적인 측면이 가장 많이 반영되어있습니다. 귀족과 검술, 그리고 무예가 뛰어난 기사, 그리고 그 기사는 반드시 모시게 되어있는 귀부인이나 아가씨…

이런 설정은 기사도이지만 거기 그러나 가장 차이가 나는 점은, 그 모든 설정들이 작가가 인위적으로 만든 단어들로 치환이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그 설정들과 그것들을 표현하는 언어 자체가 굉장히 좋았습니다. 소설이 그리는 대륙의 이름은 로젠다로, 그리고 주인공 남자의 이름은 퀴트린, 여자 주인공인 음유시인 이름은 아아젠 큐트.

그리고 모든 기사와 여성은 1:1 관계로 기사 – 귀부인의 관계처럼 맺어지게되는데, 그 제도이자 여성의 ‘기사’를 부르는 호칭은 바로 카발리에로. 이 카발리에로는 항상 수행하는 부인의 왼쪽 한걸음 뒤에서 따라 걷습니다. 왜냐면 거기서 걷는 것이 수행하는 부인의 어느 방향에서 공격이 들어오더라도 가장 넓은 범위를 효과적으로 보호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이 설정이 진실인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어릴 적 기억이 무서운게 저는 아직도 누군가와 함께 길을 걷다보면 왼쪽 한걸음 뒤가 가장 보호를 잘 할 수 있는 위치인가? 라는 생각을 수시로 하고는 합니다.

20년도 더 지났지만 저런 단어들이 아직도 뇌리에 확연히 기억되어있습니다. 더군다나 작중에서 자주 먹는 서민음식, 밀가루 수제비와 국수의 중간형태인 그 음식은 베베론이었습니다. 하다못해 저 기사들이 다루는 검같은 경우도 다른 판타지 소설은 날이 얇고 찌르기에 특화된 레이피어, 넓은 브로드소드 등 정형화되고 일반적인 이름을 사용했지만 이 작품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이런 점들이 바로 이 작품의 매력 포인트중의 하나였습니다.

작중에서 손꼽히는 뛰어난 검술실력을 가진 귀족인 퀴트린은 아름다운 외모에 냉철하고 무서운 성격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는 그대로 살아가면 여느 귀부인의 카발리에로가 되어 탄탄대로의 보장된 인생을 살 것입니다. 그런 그의 눈 앞에 어느날 천민인 음유시인 아아젠 큐트가 나타납니다. 딱히 아아젠이 퀴트린을 향해서 사랑을 갈구하거나 요샛말로 플러팅을 하지는 않습니다. 아아젠에게 퀴트린은 그저 동경의 대상일 뿐이지요.

소설은 그렇게 흘러흘러갑니다. 신분을 뛰어넘어 사랑을 하는 것은 당연히 금기시되어있습니다. 소설의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여러가지 에피소드가 쌓입니다만, 미연시처럼 어떤 분기를 타서 둘이 확실하게 엮어질 에피소드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소설 분위기 자체가 그렇게 자극적이지 않습니다.

그저 얇은 인연의 에피소드가 한겹 한겹 쌓이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점점 가깝게 물들어가는 식입니다. 그러던 중에 소설의 중후반에, 결정적인 순간이 나옵니다. 퀴트린과 아아젠과 다른 사람들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거기서 퀴트린이 자신의 검을 빼어듭니다. 신기하게도 아직도 기억하는데, 아아젠은 아마 그 순간 퀴트린이 자신을 베려는 줄 알았고, 자신이 동경하고 좋아하는 퀴트린의 손에 생을 끝나게 된다고 해도 여한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러나 퀴트린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다른 말이었습니다. (아마 소설을 읽는 우리네 독자들이야 충분히 예상을 하고 있던 것이었겠지만요)

아아젠 큐트, 저를 당신의 카발리에로로 받아주십시오

이것은 정말 엄청난 선언이었습니다. 자신이 가진 신분과 인생, 미래를 유지하기 위헤서는 아아젠과 엮이면 안되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자기가 천민 음유시인 여자의 카발리에로가 된다는 것은, 기사의 서약을 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 남녀간의 연인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된다는 것은 가진것을 모두 포기하고 도주의 삶을 살아야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생이 끝난다는 생각을 하던 아아젠의 귀에 들려온 것은 완전히 180도 다른 이야기였습니다. 저 말을 들은 아아젠은 이것이 현실인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감당할 수 없는 행복, 꿈과같은 제안을 수락하며 새로운 삶을 받아들이기로 합니다.

퀴트린이야 그렇다 치고, 아아젠으로서도 지금까지 살아왔던 삶과 비교하면 그리 좋은 삶은 아닐 것입니다. 아니, 물론 지금보다야 훨씬 좋은 삶이겠지만 그렇다고 편하기만 한 인생은 아닙니다. 둘은 사회와 다른사람들이 허락하지 않은 삶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둘은 서로만을 바라보며,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둘 만의 보금자리를 찾아 떠납니다.


둘은 행복한 삶을 삽니다. 소설의 중후반이 지나고나서야 이어진 둘의 삶은 잠시지만 행복합니다. 그렇지만 그 행복은 매우 짧습니다. 무슨 이유인지 정확히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 둘의 인생이 그렇게 쉽게 흘러가지만은 않는 것이 소설의 설정이었을 것입니다.

둘이 살고있는 지역이었는지, 아니면 귀족으로서 해야할 책무와 품위를 저버린 퀴트린, 그리고 귀족에게 꼬리를 쳤다는 오명을 쓴 아아젠을 세상이 가만 내버려두지 않은 것인지, 둘은 평온한 삶에서 끌어내어져 전쟁에 휘말리게 됩니다.

아마, 둘이 함께 하기로 하면서 원래 살던 나라를 떠나야 했고, 그들의 삶의 방식을 받아들여주는 조그만 나라로 가게 되었을 겁니다. 그런데 원래 살던 나라가 강대국이고 정착한 나라는 약소국이었을 거구요. 원래 살던 나라에는 퀴트린보다는 못하지만 만만치않은 기사들이 꽤 많고 군대도 막강한 반면, 그들이 정착한 약소국에서는 퀴트린이 거의 유일하고 절대적인 기사였을 것입니다.

그들이 현재 살고있는 나라를 침공해온 그들의 원래 조국인 강대국. 퀴트린은 그에 맞서기로 합니다. 자신들을 받아준 나라에의 의리도 있을 것이고, 자신들을 받아준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이기도 할 것입니다. 복잡미묘한 심정일 것이었을 것입니다.

자기가 태어난 나라이고 자신의 부모 친지 친구가 있었지만, 자신의 삶을 받아들여주지 않은 나라가, 지금 자기가 살고있는 곳을 침공해온 것입니다. 소설의 결말은 그 강력한 군대를 향해서 퀴트린이 달려나가는 것으로 막을 내리고,아아젠은 그런 퀴트린을 생각하면서, 슬픈 노래를 부르는 것으로 소설이 끝났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원래 음유시인이었던 아아젠이, 본인들의 슬픈 이야기를 노래로 만든 것이지요. 그리고 그 노래의 제목이 이 책의 제목, 하얀 로냐프 강이었습니다.

하얀 로냐프 강의 특징

위에서 설명했지만 다시한번 요약하자면, 이 소설의 특징은 바로 다른 판타지 소설과는 다른 절절한 스토리 입니다. 다른 판타지 소설은 1) 웅장한 세계관 2)기상천외한 마법과 이세계 생물들 (예를들면 드래곤이나 드워프, 고블린 등) 그리고 3) 뛰어난 능력을 다룬 주인공들의 활약상 정도가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책에서는 화려한 마법을 쓰는것도 아니고 주인공이 검술이 뛰어난 탑 급의 실력을 가지고 있지만 그렇다고해서 상대 군대를 한번에 쓸어버리는 식의 실력을 가지고 있지도않습니다. 그런 면에서는 우리가 알고있는 판타지소설보다는 어쩌면 중세 기사도 소설이나 삼국지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지만 작가의 뛰어난 스토리텔링 능력덕분에 PC통신 시절부터 수많은 독자들의 눈물을 자아냈고(!!) 명실상부한 2000 년대 판타지 소설의 대표 작품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다시한번 이 작품을 읽어보고 싶습니다. 그렇지만 이 작품을 처음 접한 2000년 초반의 저와 지금의 저는 너무나 많이 달라졌어서, 지금 새로 이 책을 읽을경우 20여년전과 같은 감동을 느끼지 못할까 걱정이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좋은 추억을 훼손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지요.

아무래도 2000 년대 판타지 소설은 선구자로서 프리미엄이 있었고, 지금은 그 유산을 물려받아 훨씬 재미있는 소설이 많이 나와있기때문에, 지금보면 옛 소설이 그때봤을만큼의 재미를 주지 못할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읽어보지 못한 하얀 로냐프 강 2부, 퀴트린과 아아젠 이후의 이야기를 다룬 책은 읽어볼 필요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인기가 많아 2006년 이후 양장본까지 출간된 만큼, 분명 어느 정도의 재미가 있을 것 같은 느낌입니다. 이 포스팅 다음으로는 본격 현대 판타지의 시대를 연 작품인 가즈나이트에 대한 소감과 묵향에 대해서도 다뤄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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